나는 올리버 색스 박사님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로 알게 되었다.
그 책은 대학 시절 "이상행동의 심리"가 최애 교양 과목이었던 나의 취향을 저격했고, 지금까지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 중 하나로 꼽고 있다. (현재까지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와 투 탑이다. 이상행동 심리와 뇌 질환과 관련해서 읽었던 책은 또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 과학자입니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그들은 내가 아프다고 한다"가 있다.)
"온 더 무브"는 올리버 색스 박사의 자서전이다. 그는 평생을 다양한 취미에 열정을 쏟으며 살았다. 오토바이, 사랑, 보디빌딩, 수영, 과학, 생물학, 화학, 뇌과학 모두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가지 취미를 말하자면, 바로 "글쓰기"이다. 그는 평생 1,000권의 일기장을 지닐 정도로 글쓰기에 진심이었다.
"온 더 무브"에는 그의 사진도 실렸다. 여행을 다니며, 이동하며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인상 깊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책 읽기는커녕 글을 쓸 생각은 하지도 못할 텐데. 그만큼 글쓰기가 그의 삶의 일부이자 위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먹물쟁이라고 했는데, 잉크로 얼룩져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나 70년 전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열 네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이 현재 1,000권에 육박한다. (…) 나는 꿈속이나 밤중에 생각이 떠오를 경우를 대비해 항상 머리맡에 공책을 놔두고, 수영장이나 호숫가, 해변에도 웬만하면 한 권 놔둔다. (p.464)"
올리버는 자신이 글쓰기를 그리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가 자신의 생각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보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며 생각을 하고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분명하게 정리된다. 내게 글쓰기는 정신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다.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이 꼴을 갖추어가는 과정 전체가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 오히려 일기는 내가 자신과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자신과의 대화에 필수적인 형식의 글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종이 위에서 생각한다고 꼭 공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편지봉투 뒷면도 되고 메뉴판도 되고,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에든 쓰면 그만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글귀가 나오면 밝은 색 색종이에 옮겨 적거나 타이핑해서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아놓기가 다반사였다. 시티아일랜드에 살 때는 그렇게 베껴놓은 글귀가 첩첩이 쌓여 바인더 링에다 꿰어 사무실 책상 위 커튼 봉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기도 했다. (p. 465)"
글쓰기에 몰입할 때 그는 어떤 것에서도 얻지 못할 기쁨을 얻었다. 마치 명상과 같은 상태를 누린 것이다.
나는 말년에 올리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처음 무언가를 했을 때처럼 지금도 그 일을 할 때 매일 새롭고 변함없이 재미있다고. 나에겐 그렇게 말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만 있더라도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글쓰기는 잘 될 때는 만족감과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 어떤 것에서도 얻지 못할 기쁨이다. 글쓰기는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잡념이나 근심 걱정 다 잊고, 아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오로지 글쓰기 행위에 몰입하는 곳으로, 좀처럼 얻기 힘든 그 황홀한 경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쉼 없이 써 내려간다. 그러다 종이가 바닥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날이 저물도록, 하루 온종일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있었음을.
평생에 걸쳐 내가 써온 글을 다 합하면 수백만 단어 분량에 이르지만, 글쓰기는 해도 해도 새롭기만 하며 변함없이 재미나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던 거의 70년 전의 그날 느꼈던 그 마음처럼. (p.466)"
올리버 색스의 본업은 의사였다. 그는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글쓰기에도 전념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이 시너지 효과를 내 훌륭한 작품이 태어났다.
그의 책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의 친구이자 시인인 톰 건은 올리버의 작품 <깨어남>을 읽고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 전에도 올리버에게는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지만, 인간애이자 연민이 없었다. 그런데 <깨어남>에서부터 사람을 향한 마음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작가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책은 긴 호흡의 콘텐츠이기에 작가가 자신을 꾸며내기가 더욱 어렵다. 말이 많으면 실수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거짓말들 사이로 진심이 삐져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진심"이 있다면 그 진심이 보인다. 반대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더욱 잘 보인다.
"네가 보여주곤 하던 ‘그레이트 다이어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어. 대단한 재능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한 가지 자질이 너무나 부족했어. 정말이지 가장 중요한 자질, 인간애라도 불러도 좋고 연민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쯤 되는 것 말이야. 그리고 솔직히 네가 좋은 작가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했어. 그런 자질은 가르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 그 연민의 결핍이 곧 네 관찰력의 한계라고 믿었지.
(…) 그때 내가 몰랐던 건 인간애라는 것이 사람이 삼십 대가 될 때까지 성장이 유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야. 그때 네가 썼던 글에서 빠져 있던 그것이 지금 <깨어남>에서 최고 지휘자 역할을 해냈어. 그것도 아주 멋지게. 네 글쓰기 스타일 자체도 인간애가 지휘하고 있어. 그랬기에 그처럼 벽이 없는, 그토록 감수성이 풍부하고 다양성이 살아있는 글이 될 수 있었던 거야." (p.342-343)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책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외에도 김혼비 작가의 "다정소감"과 범유진 작가의 "캡틴 그랜마, 오미자"가 있다.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보다도 이 세 개의 이야기에서 더 많이 배웠다. 이 책들을 통해 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음을 알았고, 그걸 머리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작가에게 나에게 사람이 지닌 최고의 자질인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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