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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창고/☀️ 일상의 생각

파친코 책 후기: 살아남는 조선 여자들의 이야기

by 림뽀 2022.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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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초반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감질 맛나게 보기엔 성이 안 차서 책을 샀다.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살아남을 거니까."

 

영상이나 책을 아직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가 다분한 글이므로,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길..😊

 

1. 선자는 고한수를 사랑했을까?

https://collider.com/pachinko-trailer-korean-drama-apple-tv/

선자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고한수와 사랑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짧았지만 정열적인 사랑이었다. 시간이 흘러 고한수는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 그러나 선자의 꿈에서 한수는 선자가 사랑했던, 젊고 에너지 넘쳤던 모습으로 찾아온다.

 

한수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 후 선자는 한수를 꾸준히 미워했다. 그가 자신의 아들보다 오래 살아있는 것이 불공평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와의 좋았던 기억은 평생 선자 곁에 남아 살아갈 힘이 되었다. 두 남자와의 사랑은 금방 끝이 났지만, 선자는 아무것도 없는 삶보단 낫다고 회상한다. 그들의 사랑이 자신을 미지의, 가능성으로 넘치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선자가 고한수와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한수 때문이 아니다. 늙은 선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젊은 자신과 소망이 가득했던 그 당시의 느낌이다. 선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남자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더 많이 사랑했다.

 

2. 고한수는 선자를 사랑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1GgKXR_J-ww

한수도 선자를 사랑했다. 그는 70대 노인이 되어서도 선자에게 집착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며 이젠 네가 나와 결혼하지 않을까 했다는 얘기를 꺼낸다.

 

돈 많고 잘생긴 한수에겐 여자가 많았다. 그런데 왜 선자를 끝까지 쫓아다녔을까? 먼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준 건 선자뿐이었다. 그리고 둘의 사랑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 헤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고한수를 끝까지 벌한다. 그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밝힌 후 죽을 때까지 선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한다. 선자가 한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그의 집을 찾아갈 때 그는 집에 없다. 그가 그리도 원했던 똑똑한 아들은 명문대에 입학하나, 한수가 아버지임을 알게 된 후 자퇴한다.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결국 그의 피를 혐오해 자살한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었던 한수에게 선자와의 만남은 지속적인 상실과 거부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선자가 그에게 주었던 가장 따뜻한 감정은 동정뿐이었다. 그나마 건넸던 감사 인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았다. 선자는 늙어서 한수를 용서하지만, 노아를 그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노아는 선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수는 끝내 아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병상에 눕는다.

 

3. 살아남는 여자들

https://www.latimes.com/entertainment-arts/tv/story/2022-03-24/pachinko-apple-tv-review

 

소설의 1세대, 2세대 중 1980년대 솔로몬의 세대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선자와, 경희, 그리고 선자의 어머니 양진이다. (그리고 한수도 있지만, 한수는 선자의 삶에 5년에서 10년에 한 번 등장할 뿐이다.) 선자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경희의 남편 요셉은 불의의 사고 후 삶의 의지를 놓고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 죽는다. 선자의 남편 이삭은 투옥 후 몸이 안 좋아져 금방 세상을 떠난다.

 

선자, 경희, 양진은 장수한다. TV가 생겨 함께 전 세계를 구경하고, 아들 덕에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쌀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에서 백만장자 아들을 둔 어머니로 살기까지 참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들이 풍요의 시대까지 생존했다는 것이다. 아들과 손자가 성공을 거두는 것을 눈에 담고,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있었다.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어머니, 아내, 애인은 주로 주인공(남성)에게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남자는 여자를 얻고자 혹은 지키고자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고, 여자들은 죽어서 남자 주인공이 정의와 복수심에 불타게 한다.

 

파친코는 다르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주로 선자이다. 다른 인물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선자의 감정이 더 많이 서술된다. 왜냐하면 선자가 더 오래 살아남으니까. 선자는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다가 젊을 때 죽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다. 

 

경희의 남편 요셉은 본인이 가부장으로서 여자를 지키는 슈퍼맨이어야 한다는 이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었을 때 삶의 의지를 잃는 나약한 사람이기도 하다. 반면 경희는 요셉에 품 안에 있을 땐 겁쟁이었다. 시장에서 흥정하는 선자를 대단하게 바라보고 외간 남자가 운영하는 고깃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경희는 요셉 대신 가정을 이끄는 사람이 된다. 경희는 젊었을 때 식당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부양하고 늙어서는 선자의 어머니를 끝까지 돌본다. 경희는 소설 마지막까지 친족도 아닌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강한 할머니로 존재한다.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죽기 전에 선자에게 고한수를 만난 건 큰 실수였고 너는 나를 보러 자주 오지 않는다고 꾸짖을 만큼 자아가 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여인이었다. 결국 숨을 거두지만 가족들 품 사이에서 따뜻한 마지막을 경험했으리라.

 

이 세 여자는 영웅이 아니다. 질풍과 같은 시기를 살아내야 했던 소시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삶과 주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난 경희와 선자, 양진이 오래 살아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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