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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창고/☀️ 일상의 생각

문학동네 "단순한 열정" 해설에 반박하기

by 림뽀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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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주일간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책 세 권을 읽었다. 책 분량이 길지 않고 문장의 호흡이 짧아서 대체로 쉽게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은 순서대로 "한 여자", "단순한 열정", "사건"이다. 모두 자전적 문학으로 "한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 후 그분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단순한 열정은 타국 외교관과의 사랑(불륜) 이야기, "사건"은 20대 초반에 겪은 낙태 이야기이다. 특히 "단순한 열정"은 저자의 불륜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단순한 열정"의 해설을 들여다보자. 해설자는 부모에 생애를 다룬 전작은 "성장", "정체성 확립"과 같이 긍정인 표현과 연관 짓는 반면, "단순한 열정"은 자아의 상실, 퇴행으로 해석한다. 전작에서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에 성공하고 얻은 "고급 문화 자산"이 "단순한 열정"에서의 위험한 사랑으로 인해 퇴행했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고통과 퇴행의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단순한 열정"에서도 전작과 동일하게 성장의 경험을 말한다.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연인의 사랑이 선물이자 사치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감정적으로 소통하지도, 선물을 주지도, 편지를 쓰지도 않는 연인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잠시 원망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 사람은 자신에게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었기에 충분했다. (p.27)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사랑의 열정을 느끼는 것이 사치임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p.67)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크기보다 본인의 사랑의 크기가 더 크다고 하더라도, "그저 내가 더 운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p.34) 에르노가 본인이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의 생각보다 나의 느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강렬한 사랑과 열정을 느끼는 자가 운이 좋은 것이다.

 

그 사람이 떠난 후, 기억과 감정은 흐릿해진다. 연락이 끊기고 2년 뒤 급작스럽게 그를 만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 같지 않다. 연인은 떠나고 감정은 변했으나 사랑의 경험 덕분에 생각은 성숙해진다. 저자는 그 경험 덕분에 자신이 세상과 더 굳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나와 남의 경계선을 지울 수 있었기에 "단순한 열정"의 경험은 퇴행이 아닌 성장이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p. 65-66)

 

 

(첨언)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에르노는 일련의 사고가 발생한 후, 자신에게 찾아온 "단어들"을 문장으로 풀어쓴 것뿐이라고 말한다. 저자에게 "사고"는 작품의 영감이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사건, p.79)

 

자신의 존재가 타인에게 이해될 수 있길 바랐기에 아니 에르노는 불륜과 관련된 책을 비교적 늦게 출판하지 않았을까. (사건의 발생과 출간까지의 간격은 짧다. 다만 작품 출판 연도상으로 보자면 늦다.) 신분 상승의 이야기보다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적인 주제이니까. 저자 스스로도 글을 쓰며 검열당할 미래를 고통스럽게 느낀다. 그럼에도 끝까지 출간을 고집한 이유는 "단순한 열정"의 사건이 무시할 수 없는 인생의 큰 사고였기 때문이다. 아마 이때의 짧은 사랑만큼 자신에게 강렬한 감정을 남긴 사건이 또 없었으리라.

 

썸네일은 표지가 예쁜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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